내가 믿고 있는 올바른 가치, 그 신념을 바탕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현 세계를 지배하는 주류 세계관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것이 어떤 룰을 제시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 세계의 질서를 만들고 주도하는 곳들이 어디인지 이끄는 자들이 누구인지 말이다.
그 질서가 내가 믿는 가치와 부합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에 따라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부합한다면
그것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능력과 환경)에 따라 살아가거나
더욱 확장시킬 수 있는 부분을 모색하면 된다.
하지만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 질서를 따르지 않고 나의 신념을 고수하면서 일하고 살아 갈 수 있는 해결책을 찾고 만들어야 한다.
먼저는 인큐베이팅이 필요하다.
강요된 질서, 즉 룰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버틸 수 있는 환경을 갖추어야 한다.
부분적으로 수용할 것과 절대 타협하지 않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필요한 것은 취해야 하나 가치와 신념을 흔들 수 있는 것은 결코 따라서는 안 된다.
(내게 있어서 예학당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는 부정적이다. 테크기업에게 내 지식을 쉽게 내주어서는 안 된다.
지식 공유와 전달 그리고 보편적 확장성이라는 미명하에 무조건 타협해서는 안 된다.)
유튜브를 할 때 이 기업의 목적에 반하는 내용도 너무 드러내어 다루어서도 안 될 것이다.
또 내 모든 지식과 역량을 모두 쏟아 콘텐츠를 만들어도 안 될 것이다.
앞에 이유는 그들의 철저하고 무서운 알고리듬에 의해 노출과 확장성이 제한 될 것이고,
두 번째는 내 지식과 창의성을 그들이 결국 자신의 것으로 가져가 주도적으로 이용할 것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 역량과 지식이 대단한 것처럼 보여 지는데,
아마 내가 최선을 다하고 내 모든 것을 쏟아내도 이들은 별 관심도 없을지 모른다.
그리 대단하지 않기에. 그럴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ㅋㅋ)
사람들은 타임리스적인 것을 점차 더 많이 갈망하게 될 것이다.
변하지 않는 본질인 오리지널을 통해 세련되게 담고 친절하게 전해야 한다.(
그것을 지금의 플랫폼이나 트렌드에 잘 녹이고 담아내도록 고민하고 연구해 찾아야 한다.)
이를 원하는 사람들이 소수라도 그들과 먼저 연결되어야 한다.
추종자를 만드는 것, 즉 팬덤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은 새로운 질서와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현재의 룰과 질서에 도전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연대하여 플랫폼을 구축하고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관계를 통한 공동체성을 가지고 우리가 믿는 가치를 위해 자유와 보호에 대한 책임을 바탕으로 생산과 소비 그리고 공유 등)
기부와 후원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증여’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현 비즈니스의 교환가치를 제안 해보자.
예전에 존재했다가 비효율성으로 사라지고 감추어졌던 것들이 사회에서 발전적인 형태로 부활하고 있다.
이를 적극적으로 연구해서 아이디어를 제시하자.
(예전 서당교육이 정보통신 기술력을 바탕으로 현 교육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고,
촌락 공동체 모임이 소셜 미디어 형태로 부활하고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과 인간이 만든 것을 구분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모두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기본재료로 하기에 나중에는 보편적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만들고 하는 것이 다른 이를 위해 섬김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
디지털과 온라인을 통해 기본적인 정보를 전달하고 기본 가치를 널리 알려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야 한다.
핵심적인 지식과 가치는 그 연결된 사람들과 오프라인 모임과 만남을 통해
공유하고 관계를 맺고 연대하여 공동체성을 키워가며 움직여야 한다.
(실제 삶은 발을 딛고 입으로 먹고 몸을 통해 살아가는 현실에서 이루어진다.)
늘 질문을 하며 그것이 여전히 맞는 것인지 내가 믿는 가치에 부합하는지
지금 내 행동이 신념에 따른 것인지를 점검해야 한다.(기성의 질서뿐 아니라 지금 내가 추구하는 것에도 말이다.)
질문하지 않고 궁금해 하지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이러한 꾸준한 점검을 통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에 예속되어 살아가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건전한 비평적인 관점의 루틴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기존 질서인 이 세계와 늘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혁명이 아닌 회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혁신적이나 조급하지 않고 오랜 시간 현실 안에서 자연스러운 발전과 변해 감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의도와 다르게 급진적인 변화와 속도를 낼 수도 있다.
이는 모든 것을 주도하시는 성령께 달려있기에 그렇다.)
통찰력과 창의성은 바로 이를 위해 작동하고 필요로 한다.
현 디지털 온라인 세계에서 우리는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현실 세계에 살고 있다.
이곳에서 늘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입고 먹고 머무른다.)
새로운 과학의 발견과 기술의 발전은 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내야만 한다.
그것이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바른 자세라고 믿는다.
언제나 이 세계의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적인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인 우리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온 우주만물의 질서인 창조원리인 부여하고 지금도 유지하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늘 바라보아야 한다.
그 안에서 주체적인 인간인 우리는 믿음으로 바라는 것을 실상으로
보이지 않는 주님의 질서를 보이는 증거로서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에 채워간다.
그 모든 원리는 단 하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다.
'My Thinking'에 해당되는 글 125건
- 2023.04.15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바른 자세
- 2023.03.21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아는 것
- 2023.03.21 풍요로운 삶
- 2023.03.03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 2023.02.21 드디어 재개
- 2015.04.02 힘들다 1
- 2015.03.27 김영갑 갤러리
- 2015.03.14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자세
- 2015.03.07 예배에 대한 소견 2 2
- 2014.09.15 예배에 대한 소견 1. 2
연대를 하고 연합을 이룰 때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자들이 연대를 이루고 연합을 할 수 있다.
성숙한 자유인은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알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들이다.
연대를 이루고 연합을 할 때의 기반이 되는 또 다른 하나는 같은 그림을 볼 수 있는 비전과 안목이다.
전체의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그 안에서 각각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수행할 수 있다.
이제야 나는 현실에서 이루어가는 하나님 나라 안에 나의 위치와 역할을 인식한 것 같다.
여지 것 나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이 세월이 흐르며 바뀐 것인지 처음부터 잘못 인식한 것인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예전에 내가 생각해오던 나의 위치와
지금 내가 깨달은 위치와 그 역할이 다르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내게 주셨던 꿈과 비전들 그와 관련된 큰 그림과
그것을 이루어가는 다양한 일들과 모습들은 지금도 크게 변한 것은 없다.
다만 예전에는 그러한 그림 전체를 보며 구체적으로 그림을 완성해가도록 사람을 세우고
일들을 만들어가며 서포팅을 하는 역할로서 맨 앞선 곳에서 일을 도모하는 위치라 생각했다.
큰 그릇으로서 그만큼의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명이라고 인식했고 그렇게 감당하며 왔다.
하지만 지금은 내 역할과 위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모자람으로 그 역할이 다른 이에게 넘어 간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 자리가 아니었는지
어느 과정까지만 맡겨진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최근에 몇몇 분을 만나며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자기성찰을 해보니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이룰 수 있었던 꿈과 비전들이
이제는 이루지 못하는 상황과 현실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룰 수 있었던 그 기회를 놓친 것 일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제 그 꿈과 비전을 이전의 역할과 자리에서 감당할 수 없고 이룰 수도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한 역할과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인데 이를 몰랐던 것이다.
그만한 역할과 자리에는 요구되는 실력이 있다. 나는 그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고
그러니 그만한 역할과 자리에 있을 자격이 더 이상 되지 못한다.
그런데 여전히 그러한 역할과 위치로 나를 인식하며
그에 따른 일들을 하려하니 제대로 일이 되지 못함이 당연하다.
내가 꿈꾸며 봐왔던 그림과 일들을 예전의 나의 역할과 위치에서 감당할 만한 인물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입에서 그가 꾸며 보고있는 그림과 하고자하는 일들의 비전을 듣는데
바로 내가 10여년부터 그려왔고 하려했던 것들이었다. 나는 여지 것 해내지도 못하고 이제는 할 수도 없는데
그들은 지금 해내려 하고 이제 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왠지 묘한 감정은 들었지만 싫지 않은 그리고 무언가 꿈틀거림을 느꼈다.
같은 그림을 보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전에 내 역할과 위치라고 여겼던 자리가 저 사람이라면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나를 돌아보고 성찰한 결론은
내 역할과 위치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지금 현 시점에서 내가 감당할 역할과 그에 따른 위치가 어디인가를 인식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저 사람들과 연대를 이루고 연합을 해 내가 꿈꾸며 그리던 일들을 완수해야 한다.
이제 난 큰 그림에 한 부분의 조각을 책임지는 역할과 자리에 있다.
그리고 그만큼을 완수하고 책임을 질 만한 실력 또한 갖추고 있다.
부족하면 그것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할 만큼의 역할과 자리이기에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시는 분이 감당할 만큼을 맡겨주셨다는 신뢰가 있기에 그렇다.
이제 나의 역할과 위치를 알았으니
그에 따른 일이 무엇인지 그것을 해내기 위해 어떤 방식과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생각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조금 더 인생을 풍요롭고
사람답게(?) 살아감을 느끼려면
인생을 향유하며 살아가는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중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삶이
인생을 조금 더 (솔직히 많이) 풍요롭게 만듭니다.
자신만의 패션 스타일을 즐기고
미술과 음악을 어우러진 공간에서 누리며
오감을 만족시키는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는 것이
삶에 의미와 활력이 됩니다.
세월을 살아 갈수록 가진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더군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후 부터는
갖고 있는 것을 어떻게 잘 사용하고
누리는 것에 더 관심이 가게 되고
내가 이루거나 성취하게 된 것들이
이 사회 공동체에 어떻게 유익함으로 잘 쓰이고
전해질 수 있을까를 더 고민하게 됩니다.
아직 어리고 젊을 때는
내가 이루고 가진 것들을 빼앗길까봐
다른 이들이 알아주지 않을까봐
욕심을 내고 조바심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랜 세월 성실히 진정성 있는 노력을
통해 성취한 나의 것이라면 다른 사람이 따라는 할 수 있어도 결코 빼앗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누리며 풍요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넉넉함과 유연함을 갖추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품격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의 품위는 그가 실제 살아가는 삶에 대한 태도이며 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직업을 갖고 있고 자산을 얼마나 소유하였으며
어떤 학위나 지위를 가졌다는 것은
지금의 외부적인 사회 시스템의 구조에
‘유용하냐 아니냐’라는 한정된 기준일 뿐입니다.
위에 언급한 조건들을 무조건 나쁘다고 규정 짓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조건들이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아니라는 것이죠.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가기 위한
여러 조건 중 하나 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과 위치에서도
자신의 인생을 누리며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사회라는 구조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고 매순간 선택하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
결과에 대한 책임도 결국 자신이 져야 합니다.
다른 이나 사회를 탓해봤자 소용없습니다.
누구도 그에 대해 보상을 해주지 않습니다.
주체적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자신이 선택해야 하고
그에 따른 결과와 책임도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떤 삶을 추구하고
무엇을 누리며 어떠한 인생을 살아갈지
신중하게 생각한 후 스스로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늘 겸손하게 배워가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타인과 아름답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회를 꿈꾸고
더 나은 세상을 후손들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풍요로운삶 #김d의생각 #글 #인생 #삶 #라이프스타일 #예술 #취향 #스타일 #방향 #시선 #자유인 #주체성 #정체성 #그리스도인 #김d
예학당은 제게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
오랜시간 섬겨왔고 또 오랜시간 섬겨야 할 일이기도 하죠.
매주 목요일 특별하게 안산에서 예학당 20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따뜻한 공간에서 따뜻한 사람들과 열정과 기대가 넘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어서 행복합니다.
밤 늦게 안산에서 운전을 해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피곤할 수도 있지만
수강생들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선물로 받은 저는 그 감동에 피곤한 줄 모르겠더라구요.
서울에서 진행되는 예학당 21기가 모집중 입니다.
삶에 변화를 주고 새로운 동기부여가 되는 감동있는 시간을 함께 만들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하고 복잡하며 불확실한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시각과 선택을 위한 길잡이가 필요하시다면 꼭 등록해 주세요.
아래 링크된 예학당 홈페이지를 통해 관련 정보와 신청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학당 홈페이지
함께함이 기쁨입니다.
#예술이예수를만나다 #예학당 #안산예학당 #기독교문화 #문화예술 #강의 #문화사역 #문화수업 #예술학교 #크리스천 #김준영디렉터 #김d #나의미래공작소 #기독교세계관 #성경적세계관
오랜 시간 이곳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이트의 블로그에 글도 써 보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제게는 이곳이 더 편하고 좋더군요.
다시 이곳에서 썼던 글들을 쭉 읽어 보았습니다.
여러 추억들과 기억들이 떠오르며
다시 이곳에서 새롭게 글을 쓰고 기록들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과
그렇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만큼 자주 이곳에 기록을 남기게 될 지는 모르지만 다시 블로그를 재개 하렵니다.
얼마나 자주 이곳에 사람들이 방문하게 될 지는 모르지만 상관없이
제 생각과 시선의 기록을 남겨보려 합니다.
함께함이 기쁨입니다.
(이 문구를 제가 최초로 만든 것인지는 모르나
분명 제가 쓰기 시작한 이후로 많은 이들이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 ㅎㅎ)
버릇없이 구는 xx들 참아주는 것도 힘들고,
내가 먼저 사과하는 데도 나한테 잘못한거 사과 안하는 xx들 받아주는 것도 힘들고,
내 앞에서는 내 편인척 하면서 뒤에서 내 험담하는 xx들 다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것도 힘들다.
다들 내 상황과 형편 그리고 마음 상태는 어떤지 물어보지도 알려고도 안하면서
자기들 상처 받았다고만 하고 지들만 힘들다고 불평하는 xx들 보는 것도 힘들다.
그리고
이꼴 저꼴 가식적이고, 교만을 숨긴채 겸손한척 하고
남을 위한다하면서 가지고 있는 권력을 간접적으로 휘두르고
자기는 아무것도 없고 다 맞고 순수한척 하면서 자기 욕심만 채우고
자기들 배만 불리면서 남을 위해 실제적인 희생은 안하면서
페북을 통해 인지도와 인기를 즐기는 xx들 보기 싫어 페북을 요즘 안 하게 된다.
...
간만에 이상한 글 올려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상태가 이렇습니다.
제 개인 프로필 페북이니 글도 올려봅니다.
제 글에 찔리거나 혹은 화나는 xx들 보라고 말입니다.
오랜만에 들어와 또 이렇게 한동안 떠나갑니다.
.
.
.
.
이렇게 페북에 나만 보기로 올렸다.
친구 보기로 수정해? 말어?
사진을 보는데 눈물이 나려는 걸 참는다.
울어도 되지만 왠지 참는다.
그래야 작가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을 울리며 어루만지는 사진을 처음 만났다.
그의 평탄치 못한 삶 때문일까?
그의 사진은 자유와 평화를 담고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하늘의 영향을 받는다며
그래서 하늘의 도움 없이는
잠시도 살지 못하기에 하늘만을 믿으며
오늘도 불평하지 않고 내일을 설렘으로 기다린다는
그의 말에서 그의 사진을 본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많이 분다.
살갗에 닿는 그 결이 차지만 부드럽다.
하늘을 바라본다.
땅에 디딘 발에 힘을 줘본다.
그리고 눈앞에 세상을 바라본다.
바람도 있고 나무도 있고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의자도 있다.
하지만 고요하다.
그리고 나는 고독하다.
잠시 의자에 앉아 고독을 느껴본다.
평안하다. 감사하다.
이제사 눈물을 흘린다.
자유하다.
Writing and photo by markerskim
책을 처음 펼치고서
20페이지 정도를 읽어나가면
그 책의 실체를 알게 되곤 한다.
책의 위대함은 그때 판가름이 난다.
독자는 거기서 망설이게 되는데
책 읽기를 지속할 것인지, 멈출 것인지 갈림길에 서게된다.
빠르게 앞으로만 나아가는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시간을 거슬러가는 방법을 탐색해야만 했다.
문명의 발전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나
스스로 시대를 누리면서 보조를 맞춰 살고 싶지
끌려가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러기 위해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대 가운데
나를 찾기위해서는 시간을 거스르며
잠시라도 정지된 시, 공간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한 책이 나에게 이에 대한 해답 하나를 알려주었다.
그 책을 손에 쥐고 10페이를 읽어나가자
벌써 책에 빠져들며 깨달음에 기뻐하는 내 모습을 보았다.
디지털 시대속에 아날로그적 삶이
바로 내게 그러한 순간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연필을 수동으로 직접 깎고 그 연필로
드로잉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이 바로 그 해답이다.
그리고
그 깎은 연필을 자녀와 지인들에게
선물을 해주는 행위 또한
내가 누리는 이런 세계를 선물해주는 것은 아닐까?
나만의 공간은 아날로그적 감성이 가득하다.
저 바깥에 흐르는 시간이 이 안에서 만큼은
잠시 멈춰진 듯 내게 편안함을 안겨준다.
그러나 결코 현실인 디지털 세계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행동과 순간이
디지털 세계속에서 인간으로 제대로 살기위한
나만의 최선의 선택이며 삶의 방식 중 하나라는 거다.
Writing and photo by markerskim
이곳 블로그에 글을 쓴지가 굉장히 오래되었습니다.
잠시 페북으로 외도를 했었지요.
원래 의도는 블로그와 페북을 각각의 성격에 맞게 사용하려 했으나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멀티유즈가 안되는 저를 보며 잠시 페북에 줬던 관심을 줄이고
원래 제 스타일인 블로그에 애정을 가져볼까 합니다.
예배에 대한 소견을 나눈 후 두 번째 주제를 공지하고 참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쉽게 접근하기 애매하기도 하고 논란도 있을 법한 주제입니다.
하지만 이곳 블로그 목적이 학문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는 곳이 아니기에
(저 스스로가 블로그를 그렇게 운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전처럼 제 주관적인 견해를 편히 나누는 방식인만큼 그러려니 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주중 예배모임과 주일 예배모임에 대해
또는 지역교회의 예배모임와 예배 전문 사역단체의 예배모임에 대해
15년동안 예배사역을 감당해온 사람으로서 의견을 피력해보려 합니다.
길게 쓸수록 산으로 갈 확률이 높으니 짧게 제가 내린 현재까지의 결론만 나눠보려고 하는데요.
지금부터는 편의상 예배 전문 사역단체의 예배모임을 '주중 예배'
지역교회의 예배모임을 '주일 예배'로 칭하겠습니다.
무엇이 다르고, 서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일단 역사적인 탄생 배경과 여러가지 분석은 여기서 쓰지 않겠습니다.
현재로서 주중 예배와 주일 예배간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의 상황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주중 예배와 주일 예배간에 내용과 형식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비교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차이를 느끼기 시작하고 거기서 부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문제를 야기하는데요.
성도들이 주중 예배를 선호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기술적인 실력이 있는 예배 전문팀과 설교자가 섬기는 주중 예배를 선호한다는 거죠.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술이라고 표현해서 기분이 나쁘신 분들도 있을까해서 전문 사역자라는 용어를 쓸까합니다.
어떤 분야에 전문 사역자들이 섬기는 만큼 어느정도 완숙하거나 안정된 예배모임이 될것입니다.
주일 예배에서 맛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예배모임을 맛볼 수도 있겠죠.
그러다보니 두 번째 문제가 야기됩니다.
위와같은 것을 경험한 성도들 중에서 주일 예배를 등한시하게 되고
지역 교회의 예배에 불만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주중 예배를 섬기는 단체나 관련된 사역자들이 섬기는 지역교회로
이동이 일어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주중 예배로 인해 주일 예배가 피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지껏 주중 예배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해 설명할 때 주로
지역교회가 제대로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에
주중 예배가 필요하다라고 말들 해왔습니다.
그 말은 다르게 말해서 지역교회의 주일예배가 문제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주중예배를 통해 그것을 보완하고자 하신다라고 받아들일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선교단체의 사역도 이와같이 여겨질 수 있습니다.
지역교회가 어떤 부분의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선교단체들을 통해서 그 일을 해나가고 계시다라는 거죠.
저는 이 의견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물론 이런 이유도 분명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가 된다면 여러 문제가 생기죠.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예배가 문제가 있기에 주중에 전문 사역단체를 통해
예배를 충족케 한다는 이유는 좀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저는 주일 예배 모임과 주중 예배모임이 각자의 역할이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한 목적을 이루는 연합의 그림이라고 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역할이 무엇일지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나눠보려합니다.
쓰다보니 글이 길어져서 ㅋㅋ
문제점만 지적하고 끝나는 이상한 글이 되어버렸네요.
분명 주중예배는 한국 교회안에 좋은 영향력을 끼쳐왔습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영향을 지역 교회안에 끼쳐온 것도 사실이지요.
주목되는 스타들이 원하던 원치않던 탄생하게 되고
주목받은 개인이나 단체의 사역은 굉장히 활발하게 되고
그 사람이 섬기는 교회로 성도들의 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전문 사역단체의 예배모임에도 불균형이 일어납니다.
흔히 말하는 예배의 부흥이 일어난다면 전체적으로 예배모임이 활성화 되어야 하는데
집중된 한 곳에만 사람들이 몰리고 다른 곳에서는 인원이 줄어듭니다.
예전에 활성화 된 곳도 다른 곳이 활성화되면 유행처럼
단체들이 뜨다, 지다를 반복하는 사이클이
한국 경배와 찬양 모임의 흐름입니다.
이는 무엇인가 중요한 방향과 내용을 놓치고 있기에 일어나는 모습이 아닐까요?
다음 글에서 그 부분에 대해 부족한 견해를 좀더 발전시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구에게는 은혜를 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지만
누구에게는 피해를 주는 인간적인 흐름이라고 여겨지는
주중 예배와 주일 예배간의 밝고 어두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인 만큼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밝은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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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문화로 드러납니다.
현재 내가 속해있는 시대와 공동체 사회의 문화입니다.
일상적인 삶인 사적인 예배를 제대로 드리기 위함입니다.
아니면 예배를 제대로 가르치고는 있을까요?
예배 회복을 그렇게 많이 외치고는 있지만 우리 시대의 문화를 보십시오.
적어도 교회안에 문화를 보십시오.
세상과 다름 없는 학벌과 인맥이 판치고 권위주의가 팽배합니다.
특권의식과 특혜가 자리잡으며 평등과 균등함이 없습니다.
우리들 만의 게토에 갇혀서 '이곳이 좋으니, 이곳만 좋사오니' 합니다.
보여지는 외형적인 것에 우선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반영된 이 시대 사회를 보십시오.
우리는 예배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찾으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증명) 해내는
예배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행위가 드러나는 것은 순간의 분위기와 느낌이 아닙니다.
지역교회의 성도 숫자도 아니고 집회현장의 뜨거움도 아닙니다.
그것은 맞을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장 정확한 것은 크리스천들이 있는 그 곳의 삶.
살고있는 사회의 모습이요 문화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문화로 드러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가르칩니다.
"문화사역은 개인에서 씨앗을 심고
사회에서 함께 꽃을 피워 다음세대에 열매 맺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행위의 열매는 다음세대에 드러납니다.
우리는 지금 전 세대가 삶에서 드려온 예배 행위의 열매를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게 하시겠습니까?
바로 지금 당신이 삶에서 드리는 예배행위가 그것을 결정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분을 기준으로 사십시오.
그분이 깨닫게 해주신 성경 말씀을 삶에 창의적으로 적용해 구현하십시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오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예배행위입니다.
다음에는 선교단체에서 드려지는 주중 예배와
지역교회에서 드려지는 주일 예배에 대한 소견을 나누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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