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독교 예술 비평과 현실
여기서는 본인이 주로 다루고있는 음악이란 영역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보려고 한다.
물론 "기독교 안의 음악들과 책들이 이러한 평가를 받을 만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그러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성경을 묵상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여러 공부와 기도 가운데에 깨닫고 얻어진 내용들을 직설적이 아닌 그 안에 예술적인 요소들을
가미해 나타내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다.
이 말은 올바른 교리와 신학을 바탕으로 이 세상을 분별하며 음악이라는 영역만의 방법으로
성령님을 통해 깨달은 바를 표현하려 노력했다는 이야기이다.
정확히는 내가 보고 듣고 깨달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바 그대로를 음악적인 가사로 표현하려고 했다.
(다른 분들이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또, 본인이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스스로 이러한 노력해왔고 이 노력들을 통해서 가사를 써왔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수준이 아직 이것밖에 안된다.)
때로는 꽤 많은 분들이 너무나 쉽게 드러난 가사만으로 신학도 모르고 음악도 제대로 모르는 무식쟁이로
치부하여 평을 내리실 때가 많기에 그렇다. 우려하시는 대부분은 고려하고 감안해서 쓰여진 가사들이다
그것을 발견해주기를바란다. 그리고 그 다음에 부족한 부분과 좋은 부분 모두를 평가해주시기를 바란다.
특별히 예배 안에 쓰여지는 음악은 예술적 가치가 무시되어도 좋다는 식의 의견이 많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드러내놓고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받아들이는 방식과 누리는 방법을 보라)
예배음악은 예배라는 목적과 음악이라는 형식이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예배라는 이름아래 음악이라는 특성이 무시되거나 짓밟히는 것을 보게 된다.
신학이라는 잣대만으로 음악을 난도질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단, 예배음악은 분명 예배를 위함이고 가사의 내용과 음악적 형식 모두 철저히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께 맞춰야한다.)
만일 목사님들이 제 가사에 의견을 제시하신다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예술과 음악이라는
영역에 대해서도 공부하신 후 의견을 주셨으면 좋겠다.
(때때로 '신학을 전공하면 모든 지식과 기반을 다 아는 것인듯' 말씀하시는 분들을 볼때마다 당황스럽다.
이는 중세 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을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
대체한 사상이 여전히 흘러오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한다.)
성경을 통한 신앙의 내용을 '음악'이라는 그리고 '예술'이라는 영역으로 표현할 때
바라봐야할 중요한 '형식'과 '내용'들이 무엇인지 그래서 '예술과 작품을 감상하고 누릴 실력이 있는 지'를
먼저 '아는 것'과 이를 '갖추는 것'은 비평을 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모든 예술 원리의 근원이 하나님이신 만큼 성경에서 말하는 구현되는 원리를 볼 수 있어야 겠다.
(정말 죄송하지만 교회음악을 전공한 것이 예술과 음악에 대해 성경적인 올바른 관점을 갖고 있는 것과 꼭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없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예술과 작품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 못하는 것이다.
아니 일차원적인 겉으로 드러난 직접적인 표현자체만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그래서 이원론적인 태도를 취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표현될 때 그것이 무엇을 위한 비유와 은유인지 전체 맥락 안에서 어떤 상징과 매개역할을 하는지
전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어떤 소재가 왜 그렇게 쓰여 졌는지 전혀 파악을 못하는 것이다.
상상력이 없기에 메마르게 되며 삶에서도 창조적인 적용이 없는 것이다.
어떤 분의 글 중에 상상을 매우 위험하고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을 하신 분을 보았다.
상상 없이 어떻게 성경에 쓰여진 말씀을 유추하고 생각 할 수 있단 말인가? 상상과 공상이나 환상을 구별 못하는 것 같다.
(상상 없이 어떻게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에 증거인 믿음을 삶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인가?)
한국교회 안에서 위대하고 다양한 예술가가 배출되지 못하는 현실
단순히 교회의 하부문화로 질 낮은 작품들만이 만들어지는 현실
음악이란 영역이 한정된 예배모임에 적합한 형태와 목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부를 수 있는 장르만 인정받고
누려지는 현실에 마음이 아프다.(본인은 분명 예배가 아닌 예배모임이라 칭했다.)
4. 결론
꽤 많은 분들이 마커스 라이브 워십 앨범이 나올 때 마다 어려워서 교회에 쓸 만한 곡이 없다고
앨범이 안 좋다고 평한다. 어떤 분들은 편곡이 너무 무난해 쓸 곡이 없어 앨범이 안좋다고 한다.
그 평의 기준이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궁금하다.(아예 예배 자체를 놓고 평가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불특정 다수의 회중 경배와 찬양의 형태로 실제 예배모임을 녹음한다는 것을 고려해보셨으면 좋겠다.
음악이란 것이 만인에게 불려지고 사용되어야만 훌륭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예배모임에 쓰여야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인가?
모든 이들에게, '대중에게 적합해야 한다는 보편적 기준'이라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와 '미국식의 실용주의'와
'인본주의적인 평등'이라는 가치로부터 나온 생각이 아님을 자신할 수 있는가?
보편적이어야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적합해야 좋고 옳은 것이라는 기준 말이다
저 깊고 오랜 세월 교회에도 침투해온 인본주의적 세계관에 지배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리'란 그리고 '옳고 좋은 것'이란 꼭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바로 여기서 부터 '창조적인 다양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위에 말한 '인본주의적인 보편성'은 '획일화'를 낳는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해 내야만 한다.)
지금의 '교회 문화와 신앙의 형태'가 '획일화' 되고 있는지 '창조적인 다양성'이 있는지
지금 이순간 자신의 삶과 교회를 바라보며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비판하고 비평해봐야 할 것이다.
음악이란 아니 예술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선물은 선물 그대로를 인정하고 그 고유의 특성대로 창작하고 누리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다.
그것이 주신분의 의도이고 목적이며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에 그렇다.
그것을 위해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 있음을 그러한 영역의 사역자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개인적인 감정과 생각이 담긴 글임을 그리고 그러한 공간임을 이해해 주시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진솔하고 좋은 글들로 연재들이 이어져 나가길 바라며 첫 번째 연재를 마무리 짓습니다.
Written by markerskim